에베소서 2장 11-22절: 교회는 공사 중

해설:

앞(2장 1-10절)에서 하나님이 각 개인에게 베푸신 구원에 대해 설명한 사도는, 그 구원이 믿는 사람들 사이에 만들어 내는 변화에 대해 설명한다. 

수신자들은 이방인으로 살 때 할례를 특권으로 여겼던 유대인들로부터 무시 당했다(11절). 그들은 이스라엘이 받은 “약속의 언약”(12절)과 상관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 없이 살았고, 따라서 그리스도(유대인들이 기다렸던 구원자 메시아)는 그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졌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었다(13절). 하나님에게 멀어져 있던 그들이 이제는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 표현은 이사야서 57장 19절의 말씀(“이제 내가 말로 평화를 창조한다. 먼 곳에 있는 사람과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에게 평화, 평화가 있어라”)에서 나왔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진 사건을 두고 사도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14절)라고 선언한다. 여기서의 “평화”는 “원수 된 것”의 반대 개념이다. “화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율법이라는 담이 가로막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구원의 유일한 통로로 간주한 까닭에 이방인들을 정죄하고 배척했고,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혐오했다. “원수 된 것”은 그런 상황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인류의 죄값을 치루셔서 “원수 된 것”을 허무셨다. 이로써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셨고(16절), 당신 안에서 새로운 인류를 창조하셨다(15절).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즉 이방인)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즉 유대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고(17절), 누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된다(18절).

결론으로서, 사도는 두 가지의 비유를 사용하여 그들의 달라진 신분을 설명한다. 과거에 그들은 “외국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 되었고, 과거에 “나그네”였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19절). 여기서 사도는 신도 개인 개인이 아니라 신도들의 연합체인 교회를 생각하고 있다. 

계속하여 사도는 성전 건축물을 비유로 사용하여 교회의 성격을 설명한다. 교회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교회의 “모퉁잇돌”이시다(20절). “예언자들”인 구약의 예언자들이 아니라 신약 시대의 예언자들을 가리킨다. “모퉁잇돌”은 건축을 할 때 기준으로 세우는 첫번째 돌을 가리킨다. 그 이후로 쌓아 올리는 모든 벽돌은 모퉁잇돌을 기준으로 삼는다. 교회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전해 준 믿음의 전통 위에 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지어져 가는 성전이라는 뜻이다(21절).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라는 표현으로 사도는 믿음의 공동체는 언제나 완성을 향해 자라가야 하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그럴 때, 교회는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22절)가 된다.      

묵상:

앞에서 사도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세우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맡기셔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1:23)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알고 보면, 이 말은 “바울이 제 정신일까?” 싶은 의문을 가지게 합니다. 이 편지를 쓸 때 교회들은 집에서 모이던 가정 교회였습니다.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하층민들이었고, 모임의 규모도 보통 삼십에서 오십 명 정도였을 것입니다. 교회 직제도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고, 교회로 모여서 행하는 일들도 제 각각이었습니다. 주변 사회에서는 그들의 ‘이상한 신앙’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도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1:21)을 가지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교회의 머리이시며 교회는 그분의 몸이라는 대담한 주장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분석하여 얻은 결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어난 사건의 흐름을 보고 얻은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오직 믿음으로만 그분의 자녀로 회복되는 길을 여셨습니다. 과거에 인류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분 되어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인해 그 구분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인류가 탄생했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계획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1:10)인데, 그 계획이 어떤 것인지를 교회를 통해 미리 보여 주셨습니다. 

1장에서 교회를 몸에 비유했던 사도는 2장에서는 성전에 비유합니다. 교회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20절) 세워진 성전과 같습니다. 그 신앙 고백이 사도신경 안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가 성전 건물의 모퉁잇돌이십니다. 건물을 지을 때 모퉁잇돌을 기준으로 벽돌을 쌓아 올리는 것처럼,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21절과 22절에서 사도는 현재 수동태 동사를 사용하여, 교회를 지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짓는 일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교회를 단순히 건물이라 하지 않고 성전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교회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교회에 대한 우리의 시각과 관념에 충격을 안겨 줍니다. 교회로 모인 수가 아무리 적고 모인 사람들이 세상적으로 아무리 부족해도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전해 준 기초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서로 연합하여  건물로 지어져 간다면,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그 공동체 안에 거하시어 성전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통해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미리 보여 주십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대체 불가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교회를 대할 때 경외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교회가 더욱 거룩한 몸, 거룩한 성전이 되도록 기도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Comments

5 responses to “에베소서 2장 11-22절: 교회는 공사 중”

  1. 주님의 영이 계신곳이 교회인것을 고백합니다, 성도들의 몸이 가정이 각 교회가 그리고 공교회가 성전인것을 알고는 있습니다만 믿음이 부족해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과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처지입니다.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영광드리는 예수님 중심되는 사귐의 소리 식구들의 가정과 교회가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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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gachi049 Avatar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가난한 자, 병든 자, 약한 자를 구분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받아주시므로 교회의 한 지체를 만드셨습니다. 주 안에서 한 몸인 모두가 십자가 만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동행하시고 인도하옵소서.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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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Chis Yoo Avatar

    교회에 모퉁이 돌이 되시는 주님, 십자가로 원수된것을 허무시고 둘이 하나가 되는 한몸으로 만드신 은혜를 봅니다.

    전에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이방인 이었지만 십자가에 은혜로 이제 진정한 하나님에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에 성령이 거하시는 교회에 공동체안에서 주님에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갑니다.

    늘 부족하고 넘어 지지만, 주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우리 사귐에 교회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곳에서 지속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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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올림픽이 열리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축제답게 206개국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유엔의 정회원국가 숫자 193개보다 더 많은 숫자입니다. 전세계 국가수를 검색하면 193개로 나옵니다. 유엔 정회원 국가들이고 바티칸과 팔레스타인 두 ‘국가’는 참관 회원국의 자격을 갖습니다. 올림픽은 올림픽 위원회 (IOC)에 가입한 국가올림픽 위원회를 통해 참여합니다. 독립국 뿐 아니라 자치령 (속령)도 올림픽 위원회를 조직하고 IOC에 가입해 동참할 수 있습니다. 괌, 버뮤다, 아루바, 쿡제도, 코소보, 대만 (중화 타이페이), 홍콩 등이 독립적으로 참가하고 있습니다. 리우 올림픽 때부터 ‘난민 선수단’이 생겼습니다. 15개 국가에 거주하는 난민 선수들이 파리올림픽에 참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러시아와 벨라루스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페널티로 올림픽 출 전권이 박탈되었으나 ‘개인 중립 선수단’에 들어와 참가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합니다. 이쯤되면 전세계를 아우르는 올림픽이라고 할 만 합니다. 올림픽이 주는 특별한 도전과 감동이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 살면서는 올림픽을 즐기는게 어렵습니다. 미국 선수들 경기만 방송하니 한국 선수단 경기 구경은 아주 어렵습니다. 중계권을 살 때 외국의 교포들을 위한 현지방송의 중계권까지 포함해 계약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외국에 살면 한국에서 보던 스포츠 중계방송은 사라진 사치품으로 느껴집니다. 그래도 스포츠를 많이 좋아하면 유료 서비스를 받아서라도 보겠지만 종일 가게에 있는 우리 부부에겐 방법이 되지 않습니다. 올림픽 같은 대규모 이벤트가 있으면 한국 생각이 납니다. 아파트 단지가 같은 연속극 (혹은 스포츠)을 보고 다음날 출근해 똑같은 이야기하면서 흥분하고 ‘우리는 하나’ 라며 착각하고 살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공동의 경험을 나누고 돌아섰는데 도리어 답답하고 우울하고 외로왔습니다. 남과 같아야 하면서도 나만의 것도 있기를 바라는 양가적인 감정이랄까요. 함께 살아도 각자의 방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같은거? 개발도상국의 향수라고, ‘가난해도 정이 있던 시절’이라고 포장하고 미화하기엔 사회 인식과 감수성이 훌쩍 자랐습니다. 이젠 올림픽 축제의 뒤안길도 보이고, 잔치 자리에 나올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데까지 갔습니다. 나와 같은 사람이 있으면 나와 다른 사람도 있습니다. 나 위주, 내 가족과 우리 교회, 우리 사는 곳의 경계 안에 머무르는 것이 부끄러워집니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합칠 수 없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로서 하나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거룩한 성전으로 점점 자라날 것입니다 (21절). 서로 다른 것을 안 보고 말 안하는게 답은 아닙니다. 다른 걸 같다고 여길 수는 없습니다. 다른 것을 똑바로 보는게 같아지는 길, 하나로 지어지는 방법인지 모릅니다. 우리를 하나씩 보시는 주님께 지혜를 구합니다. 나도 주님처럼 하나씩 보고 또 같이 보고, 여럿을 보고 다시 하나 하나 보는 인내심과 사랑이 자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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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모퉁잇 돌”이 되신 중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그 안에 꼭 붙어 하나로 동화되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혹 상처가 나더라도, 원생능력이 있는 몸처럼, 치유되고 회복될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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