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9장: 믿음, 일관된 신실함

해설:

이야기는 다시 요셉에게로 돌아갑니다. 이집트로 끌려 간 요셉은 바로의 경호대장 보디발에 집에 노예로 팝려 갑니다(1절). 여기서 저자는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셔서, 앞길이 잘 열리도록 그를 돌보셨다”(2절)고 적습니다. 그것은 보디발에게도 느껴질만큼 분명한 일이었습니다(3절). 그는 요셉에게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음을 알고 그를 신뢰하게 되었고 점점 더 많은 일들을 맡깁니다(4-5절). 일을 맡기는 것마다 잘 되는 것을 확인한 보디발은 마침내 자신의 음식을 관리하는 일 이외에 모든 일을 요셉에게 맡깁니다(6절). 임금이나 고관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음식을 관리하는 일이었습니다. 음식에 독을 타는 것이 가장 흔한 암살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즈음에서 저자는 요셉이 “용모가 준수하고 잘생긴 미남이었다”(6절)는 사실을 밝힙니다. 그는 외모도 뛰어났지만, 성실하고 근면한 생활 자세로 인해 더욱 멋지게 보였을 것입니다. 한편, 경호대장의 직무로 인해 남편이 장기 외출이 잦았기 때문에 보디발의 아내는 외롭게 지내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요셉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울만한 안전한 놀이개 감으로 보였습니다. 

부인의 도발과 유혹은 거침 없었습니다(7절). 하지만 요셉은, 그것이 주인의 신뢰를 배신하는 일이며 하나님에게 죄를 짓는 일이기에 응할 수 없다고 답합니다(8-9절). 어리석은 사람이라면 그 유혹을 받아들이는 것이 꿩 먹고 알 먹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에게는 육신적인 쾌락이나 물질적인 이득이 아니라 신의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와 마주치지 않도록 노력합니다(10절).

그러던 어느 날, 집안에 아무도 없을 때 요셉이 부인과 마주칩니다(11절). 그는 요셉의 옷을 붙잡고 또 다시 유혹합니다. 그 실강이는 한참 지속되었을 것이빈다. 요셉은 마침내 부인의 손길을 뿌리치고 달아났고, 그 바람에 그의 옷이 보디발의 아내 손에 남게 되었습니다(12-13절). 거부 당한 애정은 증오로 변합니다. 부인은 밖에 나가 있던 종들을 불러 모아 요셉이 자신을 범하려 했다고 뒤집어 씌웁니다(14-15절). “이 히브리 녀석”(14절)이라고 말함으로써 이집트인 종들의 인종차별 정서를 자극합니다. 그들은 요셉의 주인의 총애를 받는 것에 대해 시기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부인은 요셉의 옷을 침실에 두고 남편이 오기를 기다립니다(16절). 남편이 돌아오자 요셉의 옷을 보여 주면서 동일한 말로 모함합니다(17-18절). 새번역은 “당신이 데려다 놓은 저 히브리 사람이”(17절)라고 말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은 “당신이 데려다 놓은 저 히브리 종이”라고 번역해야 옳습니다. 요셉의 인종과 신분을 강조함으로써 남편의 분노를 자극하려 한 것입니다. 보디발의 입장에서는 요셉을 단칼에 처형할 수 있었습니다. 노예가 주인을 성폭행한 죄는 즉결처분에 해당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요셉을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으로 보냅니다(20절). 아내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형들에게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나 노예로 팔려온 요셉에게 있어서 보디발의 총애와 신뢰는 인생 반전의 계기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감옥행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생의 의지를 놓아 버릴 만도 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감옥에서도 여전히 신실하게 살아갑니다. 저자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면서 돌보아 주시고, 그를 한결같이 사랑하셨다”(21절)고 적습니다. 얼마 후에 간수장은 요셉을 신뢰하여 그에게 모든 것을 맡깁니다(22-23절).  

묵상:

저자는 요셉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하지만 그는 먼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의 목적은 성공과 번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에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편애를 등에 업고 천방지축이었던 철부지가 고난의 여정을 통해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토록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요? 

이집트로 끌려 와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 가기까지 시간적으로 얼마나 걸렸는지 모릅니다만, 그 기간 동안의 고난이 그를 변화시켰을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는 인생의 바닥에 내쳐지면서 많은 눈물로 후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깊은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그는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일에 인생을 걸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 신속하게 신뢰를 얻고 주인의 총애를 받습니다. 그러나 성공은 그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목적은 성실이었습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의 법도 안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며 사는 것이 그의 삶의 방법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로부터의 집요한 유혹에도 끝내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가 만일 빨리 성공하는 것을 목적 삼았다면, 그 유혹을 받아들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성공을 위해 신의를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보디발의 부인으로부터 모함을 받아 감옥에 던져지는 불행을 만났을 때, 그는 너무나 억울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이주민 노예로서의 신분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그 불의를 참아야 했습니다. 그는 절망감에 자포자기 하고 앙심을 품고 인생을 저주하며 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자신을 추스르고 신실하게 살아갑니다. 그로 인해 그는 간수장의 마음에 들게 되었고, 신임과 신망을 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저자는 그 이유에 대해 “주님께서 요셉을 돌보셔서,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나 다 잘 되게 해주셨기 때문이다”(23절)라고 적습니다. 

이주민 노예였던 요셉에게 이집트의 사법제도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소수자로서 요셉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집트의 사법제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믿음의 대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깊은 나락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그분의 정의를 믿고 의지하며 이 땅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는 잘 되거나 못 되거나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의 정의를 믿고 신실하게 살았습니다. 일관된 신실함, 그것이 믿음의 본질임을 다시 확인합니다. 


Comments

4 responses to “창세기 39장: 믿음, 일관된 신실함”

  1. 세상 끝까지 함께하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잊지않고 임마누엘 주님을 피부로 느끼며 살기를 원합니다. 평탄한 신작로를 걸을때나 험한산길에서 헤멜때라도 함께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감사하며 사는 신실한 제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세속적인 모든 욕망을 온전히 내려놓고 하늘의 신령한 지혜로 사는 삶을 살아내는 사귐의 소리 가족들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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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성서의 조명이 요셉을 비추면서 처음 나오는 이야기는 그의 꿈 이야기였습니다. 꿈에서 요셉은 대장처럼 중앙에 서 있고 형들은 그를 받듭니다. 들의 곡식단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이 자기에게 절을 하는 꿈도 꿉니다. 자기 혼자 알고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형들에게 자랑삼아 말하니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의 편애를 불만스럽게 여기던 형들이 귀엽게 들어주었을 리 없습니다. 그렇게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던 요셉은 이집트에 종으로 팔려 가고 맙니다. 이집트에 가서 처음 들어간 집은 왕궁 경호대장 집입니다. 가나안 아버지 집에서 살던 요셉과 이집트에서 종으로 사는 요셉은 다른 사람처럼 보입니다. 철 없고 자기 위주이던 요셉은 어느새 현명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운 일꾼이 되어 주인의 총애를 받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인물들을 기억하게 만드는 키워드가 있는데 요셉에겐 ‘총애 favor’라는 단어가 어울릴 것 같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를 좋아합니다. 이쯤에서 눈에 띄는 변화는 요셉 인생의 수동성입니다. 얼마 전 묵상의 제목 가운데 ‘거룩한 수동성’이 있었습니다. 이삭의 삶을 묵상할 때 나온 제목입니다. 이집트에서 사는 요셉의 삶도 거의 다 수동태입니다. 노예로 팔려가는 시작부터 오늘 주인 보디발의 아내에게서 유혹을 받고 누명을 쓰게 될 때까지 다 수동적으로 ‘당하는’ 일들입니다. 앞으로 일어나는 일들도 백퍼센트 그의 의지 밖의 일입니다. 그가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부분은 자기 태도 뿐입니다. 자기가 원하는대로 가는 인생은 아니지만 그는 성실하고 정직하게 주인을 섬겼습니다. 주인은 이런 그를 올려주었습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어 하는 일마다 성공하게 해 주신다고 기록합니다. 아브라함과 야곱 때에도 같은 표현이 나왔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의 입을 통해, 야곱은 라반의 입을 통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습니다. 성경은 보디발을 통해 요셉에게 같은 평가를 합니다. 자기의 뜻과는 무관하게 흘러가는 삶이지만 어떻게 응답하는가는 각자에게 달린 일입니다. 종의 입장은 극단적인 형편이지만 정도의 차이 만 있을 뿐 우리의 삶에도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통제할 수 있는 부분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응답에서 나타납니다. 우리는 야곱 때 만큼 요셉의 내적 세계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 주시어 사람들의 총애를 입고 산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야곱이 베델 들판에서 꾼 꿈에 비해 요셉의 꿈들은 과대망상에 가까운 자아만족형 꿈들입니다. 그가 그런 꿈들로 인해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그가 형제들을 원망하거나 집을 그리워하며 돌아갈 방법을 찾고 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주어진 여건에서 최대한 성실하게 사는 그를 보여줍니다. 수동적인 삶인데 신기하게도 능동적으로 보입니다. 삶이 달라지는 것은 조건이 아니라 응답에 달린 것이라고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좋은 것을 받고도 감사로 응답하지 않는 사람, 어떤 것이든 감사로 응답하는 사람…오늘 하루를 진실로 감사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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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gachi049 Avatar
    gachi049

    요셉이 어린 몸으로 다른 나라에 그것도 형제들로부터 팔려나갔으니 형제들에 대한 배신감,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살아온 삶과 분리되는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운지 짐작이 갑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터널을 만날 때마다 꿈으로 보여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더욱더 하나님께 의지하는 삶을 통해 믿음이 더욱 성장했으리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가까이 하는 자에게 때로는 TEST를 통해 영성을 더욱 높이시어 어떤 유혹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신실한 믿음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직도 부족하고 변하기 쉽습니다. 오늘 성령께서 동행하셔서 신실한 믿음으로 하루를 살게하옵소서.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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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mkkim2 Avatar

    분명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저는 고난, 시련, 역경을 통해서 아직도 저의 신앙이 쑥쑥 자라고 있지만은 않은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신앙에 있어서는 철부지 어린 아이인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언제쯤 단단한 식물을 소화시켜 믿음에 장성한 자가 될지, 그 고난/시련/역경의 충분한 자양분이 될수 있도록 계속 묵상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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