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6장 1-25절: 밀려난 곳으로 찾아가시는 하나님

해설:

이삭과 그 가족은 브엘라해로이에 살고 있었는데, 그 땅에 큰 흉년이 듭니다(1절). 아브라함 때에도 그런 일이 있어서 이집트로 내려가 잠시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번영을 구가하고 있을 때였기에 이삭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이집트로 내려 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2절). 데라로부터 시작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루어지려면 그가 가나안 땅을 떠나지 말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이삭에게 말씀 하시면서 있는 자리에서 흉년을 견디라고 말씀하십니다(3-5절). 그래서 이삭은 그랄에 머물러 삽니다(6절). 그랄은 나중에 불레셋의 영토가 됩니다. 

이삭은 그랄 사람들에게 아내를 누이로 소개합니다(7절). 당시 사람들은 외지인이 들어오면 소돔 사람들처럼 남성을 성적으로 유린하거나 아내에게 성폭행을 함으로 길들이곤 했습니다. 아내로 인해 자신이 살해 당할 수도 있다는 이삭의 걱정이 당시의 현실이었다는 뜻입니다. 

다행이 그 작전이 통하여 이삭과 리브가는 별 탈 없이 그곳에 정착합니다. 경계심이 풀린 이삭은 어느 날 아내와 밀회를 나누는데, 그 장면을 아비멜렉에게 들키게 됩니다(8절).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로 속이는 바람에 그를 후처로 들이려 하다가 하나님께 큰 책망을 들었습니다(20장). 아비멜렉은 이삭을 심하게 꾸중한 후(9-10절) 아무도 리브가를 건드리지 말라고 그랄 백성에게 엄명을 내립니다(11절).  

그곳에서 이삭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아서 큰 부자가 됩니다(12-13절). 처음에는 너그럽게 대하던 불레셋 사람들은 이삭의 재산과 가솔이 늘어가는 것을 보고 경계하기 시작합니다(14절). 그것은 다수자들이 소수자인 이주민에게 가지는 전형적인 태도입니다. 약자일 때는 동정해 주지만 강해지면 경계하고 배척합니다. 그들은 아브라함 때에 판 모든 우물을 흙으로 메워 버리고, 아비멜렉은 이삭에게 그곳을 떠나 달라고 요구합니다(15-16절). 우물은 목축업을 하는 그들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생필품이었습니다. 우물을 막아 버린다는 말은 오늘로 하면 가게 문을 닫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삭은 아비멜렉과 그랄 주민의 부당한 처우에 반항하지 않고 그곳을 떠나 그랄 평원에 자리를 잡습니다(17절). 그는 아버지가 팠으나 그랄 사람들이 메워 놓은 우물들을 다시 팝니다(18절). 이삭의 종들은 또 다른 샘줄기를 발견하여 우물을 팠는데, 그랄 사람들에게 빼앗깁니다(19-20절). 이삭의 종들이 다른 곳으로 가서 우물을 파자, 이번에도 그 지방 사람들이 또 빼앗습니다(21절). 이삭의 종들은 다른 곳에서 또 우물을 팠는데, 이번에는 빼앗지 않았습니다(22절). 팔레스틴 지방에서 물줄기를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데, 이삭의 종들은 우물을 팔 때마다 물줄기를 찾아냈습니다. 이삭은 그 우물의 이름을 ‘르호봇'(넓은 곳)이라고 짓습니다(22절).

얼마 후에 이삭은 브엘세바로 이사합니다(23절). 그곳에 장막을 쳤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축복의 약속을 확인해 주십니다(24절). 그는 그곳에 제단을 쌓고 주님께 예배 드린 후에 정착을 합니다(25절).

묵상:  

나이 든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이 이삭은 육신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유약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청소년기에 아버지의 손에 죽을 뻔 했으니, 키에르케고어가 추측한 대로, 그는 평생 기를 펴지 못하고 지냈을지 모릅니다. 이삭은 세 족장(아브라함, 이삭, 야곱) 중 한 사람이지만, 창세기에 그에 대한 기록은 몇 개 되지 않습니다. 이삭이 홀로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26장이 유일합니다. 나머지 이야기에서는 항상 조연으로 혹은 수동적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러한 그의 성품이 그랄 지방에서 있었던 사건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살해 위협을 염려하여 리브가를 누이로 소개한 것은 당시의 야만적 문화를 생각하면 그럴 수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두번이나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비멜렉의 보호 아래에서 그랄 지방에서 재산을 불려 갑니다. 그로 인해 그랄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여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으로 밀려납니다. 그곳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거주하던 곳입니다. 그곳에서도 그랄 사람들은 이삭을 괴롭힙니다. 광야 지역에서 물줄기를 찾아 내는 것은 당시의 기술로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토록 어렵게 얻은 우물을 두번 씩이나 빼앗깁니다. 이삭의 종들이 또 다시 물줄기를 찾아내자 그랄 사람들은 더 이상 시비를 걸지 못합니다. 

이삭이 이렇게 밀려나고 빼앗긴 것은 하나님이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 보다는 그의 유약한 성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싸워서 쟁취하는 강인한 사람이었지만, 이삭은 무력하게 당하고 빼앗기고 밀려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가 밀려 나는 곳으로 찾아 가셔서 그를 돌보시고 복을 주십니다. 그분은, 자신을 괴롭게 하는 사람들과 악다구니로 싸우지 않고 무력하게, 초라하게 물러서는 이삭을 편들어 주십니다. 이삭은 거듭 되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축복을 경험하면서 그분이 진실로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그랄에서 지내면서 겪은 고난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동행하심을 체험하게 했고, 그 고난을 거친 후에 그의 예배는 살아 났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이런 분입니다. 자신의 손으로 응징하고 보복하기를 포기하고 양보하고 손해 보는 사람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이삭에게 함께 하신 분이 지금 우리가 믿는 그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하나님을 믿고 이 땅에서 평화를 만들어 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워 이겨 자신의 꿈을 성취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실 것을 믿고 누구에게나 선대하고 필요하다면 양보하고 희생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이어야 합니다.


Comments

4 responses to “창세기 26장 1-25절: 밀려난 곳으로 찾아가시는 하나님”

  1. 원치않은 은퇴를 억울한 누명으로 계획했던 은퇴를 3년 일직 은퇴를 하여 처음에는 많이 분노했습니다만 그 은퇴가 일생의 가장 축복된 시간인것을 깨닫고 상대방의 축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던적이 있습니다. 억울한고 화가나는 일을 당하더라도 주님의 계획을 깨닫고 감사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생명의 위협을 감지하더라도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온전히 정직한 사람이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아멘.

    Like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데쟈뷰 deja vu”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게 아닌가 싶은 본문입니다. 데쟈뷰의 뜻은 이미 본 적이 있다, 같은 걸 한 번 보았다 (already seen) 는 말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름 대신에 이삭과 리브가를 넣으면 똑같은 이야기가 됩니다. 게다가 아비멜렉까지 또 나오니 같은 사람인지, 동명이인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듭니다. 현대인의 감수성에는 이상한 일이지만 당시 사회에서 여성-부인은 재산의 일부로 카운트되었던 것을 보면 리브가 (재산)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여동생 (친척)으로 소개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를 거치는 중에 독자로서 ‘설득’ 당한 셈입니다. 아버지 때와 같은 일을 겪으면서 이삭도 재산을 형성합니다. 오늘 이야기는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사건인 것 같습니다. 주인공 이삭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는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이 제물로 바치려던 아들, 쌍둥이 아들을 헷갈려서 장자권을 잘못 내린 아버지입니다. 오늘 스토리를 통해 이삭에 대해 알아 보려해도 아브라함이 했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물을 놓고 토착민들과 다툼이 있을 때 이삭은 양보합니다. 아브라함도 전에 아비멜렉의 종들에게 우물을 빼앗긴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 침묵하며 속으로 삭이다가 아비멜렉을 만나 항의를 한 뒤에 평화조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브엘세바라고 부릅니다. 이삭도 브엘세바로 갑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이삭에게 나타나시며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을 반복하십니다. 약속 갱신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늘 보호하시며 그들의 길을 순탄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삶은 우리의 삶과 차원이 다른 삶이었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타인이 경험 (간증)하는 하나님과 내가 경험하는 하나님은 다르다고, 그래서 타인의 하나님을, 성경 인물의 하나님을 부러워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생각에서 벗어났습니다. 내 삶에서 만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합니다.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고, 자기의 하나님으로 만나고 예배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이삭이 선택한 것은 양보입니다. 져주고 피합니다. 일반인의 일반적인 반응입니다. 다툼의 우물 (에섹) 다음에 적대의 우물 (싯나)을 포기합니다. 세번째 비로소 성공합니다. 르호봇이라는 좋은 이름을 짓습니다. 이삭에게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두번 씩 우물을 빼앗겼습니다. 나의 하나님도 나와 약속하십니다. 이삭의 스토리처럼 나도 르호봇의 이름을 기억할 날이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런 순간에 나는 데쟈뷰다! 할 것입니다. 성경이 다 데쟈뷰입니다.

    Like

  3. gachi049 Avatar
    gachi049

    언제나 신실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주신 은총에 감사를 드립니다. 항상 불꽃 같은 눈으로 지켜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해결하여 주실 것을 믿고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참고 견디면서, 견딜 수 없으면 고통을 즐기며 남은 여생도 주님께 맡기고 십자가 만을 바라보며 달려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동행하시고 인도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Like

  4. mkkim2 Avatar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하염없이 주고, 양보하고, 포기하고, 억울해도 참고…그런데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라는 말씀이 저에게는 너무나 어렵게 다가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아픔과 슬픔을 누구보다도 잘 아실, 그 아픔과 슬픔의 그분의 능력으로 치유해주실 것을 믿기에, 끊임없이 주님과 같은 방향으로 걷기를 원합니다. 주여, 힘을 주세요!

    Like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