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2장: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해설:

22장은 “이런 일이 있은지 얼마 뒤에”(1절)라고 시작하지만, 실은 십 수년 후의 일입니다. 이삭이 장작을 짊어지고 산을 오를 정도면 적어도 십대 중반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를 부르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굳이 시험해 보아야 했느냐?”고 질문하는 것은 관계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모르고 하는 질문입니다. “예, 여기에 있습니다”는 히브리어로 “힌네니”인데, 이 말은 전적인 순종의 자세를 표현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동안의 여러 시험을 통해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고 무슨 처분이든 따를만큼 영적으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최대, 최악의 시험을 안겨 주십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2절)이라고 표현은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를 강조합니다. 번제물로 바치라는 말은 그를 죽여서 재만 남을 때까기 태우라는 뜻입니다. 온전한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상상하기도 끔찍한 명령입니다. 

아브라함은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3절) 아들을 깨워 준비시키고 장작을 쪼개어 길을 떠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순종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명령에 괴로워서 잠을 못 이루다가 동이 트자 떨치고 일어나 일단 길을 나선 것입니다. 

사흘 길을 가는 동안 그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을 두고 수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무턱대고 하나님을 믿고 떠난 자신에게 25년이 지나서야 달랑 아들 하나를 안겨 주시더니 이제 와서 번제로 바치라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제 아들을 제 손으로 죽여서 태워 바치라는 것인가? 이민족들이 사람을 제물로 바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브라함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가 믿는 하나님은 사람을 제물로 요구하는 야만적인 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의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잡아 바치라고 하시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을 정말 믿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일들을 돌아 보면 믿어야 할 것 같은데, 지금 당장 주어진 명령을 생각하면 믿을 수가 없습니다. 

모리아 산에 도착했을 때 아브라함은 결론을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4절). 그는 두 종을 산 아래에 두고 “예배를 드리고 너희에게로 함께 돌아올 터이니”(5절) 기다리라고 한 다음, 이삭에게 장작을 지게 한 다음 산을 오릅니다(6절). 산에 오르는 동안에 사정을 알지 못하던 이삭이 제물로 쓸 짐승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습니다(7절). 아브라함은 당황하여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8절)라고 답합니다. 엉겁결에 한 대답이었지만 예언이 되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장작을 펼쳐 놓고는 이삭을 묶어서 제단 장작 위에 올려 놓습니다(9절). 어떤 사람들은 이 때 이삭이 아무 말 없이 아버지의 처분에 따랐다고 해석하지만,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어린 이삭은 저항하다가 결국 결박되어 제단에 올려져 엉엉 울었을지 모릅니다. 아버지도 울고 아들도 울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결국 아들의 목을 향해 칼을 듭니다(10절). 그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을 것입니다. ‘어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끝까지 한 번 해 보자!’는 심산이었는지 모릅니다. 

그 때 하늘에서 아브라함을 부르는 음성이 들립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또 다시 “예, 여기 있습니다”(11절)라고 답합니다. 주님의 천사는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하시면서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12절)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보니 숫양 한 마리가 보였고, 아브라함은 그 양을 잡아 번제를 드립니다(13절).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곳의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짓습니다(14절). 그런 다음 주님의 천사는 아브라함을 처음 불러 낼 때 주신 축복의 약속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십니다(15-18절).

이 이야기 다음에 저자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자손에 대해 소개합니다(20-24절). 그들은 아브라함과 달리 하란 땅에 그대로 남아 살았습니다. 나홀의 자손들을 여기에 소개하는 이유는 이삭의 아내 리브가 때문입니다. 

묵상:

믿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듯’ 신뢰하고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며 나의 삶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분의 손에 자신의 삶을 맡긴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내 존재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고 “주님, 마음대로 하십시오”(“힌네니”, 1절, 11절) 하고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아시는 분은 하나님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말은 쉬운데 실제로 행동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일이 잘 풀려 나갈 때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에 감사하게 되지만, 일이 잘 풀려 나가지 않을 때면 불안해집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리기 보다는 내 힘과 수단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나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보면 그것이 결국 문제를 더 그르치는 길이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런 실수를 반복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를 배워 나갑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고향을 떠난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에 그가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다 알지 못합니다. 12장부터 21장까지 기록된 내용은 지극히 작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떠난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가는 법을 익히기까지 수 없는 시험을 거쳤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그는 결국 하나님 앞에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처분대로 따르겠습니다”라고 말씀 드리는 수준에 이른 것입니다. 그 철저한 신뢰가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최악의 시험을 통과하면서 완성되는 장면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 이것은 우리에게 너무도 어려운 숙제요 너무도 자주 넘어지게 하는 시험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기도합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 뜻대로 인도하소서. 주님의 처사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때조차 주님을 신뢰하고 따르게 하소서.“


Comments

4 responses to “창세기 22장: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1. 수십년을 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의 고초를당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한다고 입으로 고백하면서도 실제 행함과 삶이 따르지못한 쫄보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뒤를 따르기를원합니다, 나의 모든 재물 몸 마음 영혼 생각 꿈 의식 무의식을 모든것을 주님 발아래 부럽지않게 내려 놓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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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gachi049 Avatar
    gachi049

    아브라함도 인간이기에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부여 안고 밤새도록 울고 몸부림을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지나온 세월을 뒤돌아보고 하나님을 신뢰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이삭 또한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 순종 하였습니다. 이 순종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인간을 만드신 것을 후회 할 만큼 순종하지 않아 정의의 칼 대신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 제물로 삼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인류를 구원하는 예표이기도 합니다. 주님! 말씀을 통해 순종 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믿음이 부족하니 성령께서 동행하시고 도와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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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이삭을 유대인 남성 트라우마의 상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소리를 언뜻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온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별 생각 없이 제사를 드리러 갔는데 자신이 제물이란걸 알았을 때 마음이 어떨지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트라우마의 관점에서 보면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어디까지 신뢰하는가, 어디까지 순종하는가 하는 신학적 질문이 머리에서 내려와 발등의 불이 되었습니다. 몇 년 전에 “사랑이 한 일”이라는 소설을 읽었습니다. 창세기의 몇 장면을 소재로 한 소설인데 이삭을 바치라는 오늘 본문도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삭을 화자로 삼은 챕터에서 나오는 문장입니다. “그것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라고 아버지는 나에게 말했다. 그것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라고 아버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 문장을 담은 아버지의 목소리는 내 안에서 생생하게 울린다. 맞아요. 그것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에요. 라고 나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의 신이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일어날 수 없었을 거예요. 왜냐하면 사랑이 없는 곳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니까요.” 이삭이 오늘의 사건을 회상하며 되짚는 장면입니다. 아버지에게 아들인 자기를 바치라는 명령을 한 하나님과 그 명령에 순종한 아버지를 같이 묵상하고 있습니다. 이삭의 독백은 계속됩니다. “신이 바치라고 요구한 것은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의 ‘사랑하는’ 아들이었던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그래요. 그분에게 아버지는 아들, 사랑하는 아들이지요. 사랑하는 아들을 바치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사랑하는 아들에게 사랑하는 아들을 요구하는 것도 어려워요. 더 어려워요. 자기에게 속해 있으면서 자기보다 소중한, 소중하게 여기는 무엇이나 누구를 주는 것이 바치는 것이라고. 사랑하는 무엇이나 누구만이, 오직 사랑만이 바쳐질 수 있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시지요. 그래서 바치는 것이 힘들다고요. 사랑하지 않는 것을 내놓는 것은 바치는 것이 아니라고요.”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을 사랑해서 하나님이 그런 요구를 하셨고, 아브라함은 자기를 사랑하기에 바칠 수 있었다고, 그래서 그 일은 ‘사랑이 한 일’이라고 해석합니다. 아침에 본문을 처음 읽을 때 하나님의 리허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제사가 하나님께는 예수님을 내주시는 마음의 준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경한 생각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나같은 사람으로 생각하다니요. 하나님한테 무슨 연습과 준비가 필요하겠나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기에 아브라함에게서 신실한 사랑을 확인하신게 아닐까. 사랑에 사랑으로, 순종에 순종으로, 믿음에 믿음으로 화답하시어 예수님을 주신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아들을 ‘바치는’ 아브라함은 사랑을 이해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사랑하는 것을 바치는 것이 사랑의 징표라면 아픔과 상실을 각오하지 않고 ‘하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 할 수 없습니다. 신학적 명제가 발등에 불로 떨어졌습니다. 이삭을 바치려고 치켜든 칼로 자기 목을 찌르고 싶었을 아브라함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웁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 비움을 배웁니다. 네 마음의 일부를 달라고 하시지 않는 하나님. 네 속을 크게 덜어 달라시는 하나님. 너를 완전히 비울 수 있는 데까지 가보라는 하나님…나는 못할 것 같습니다. 무섭습니다. 도와주세요. 그저 아주 조금씩 당신을 향해 움직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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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mkkim2 Avatar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정작 같은/비슷한 상황이라면, 저는 아마도 직접적으로 순종하기보다는 하나님과 타협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기도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 자체가 하나님을 “전능하신 나의 주관자”라고 믿고 있는 않은 모습이기에, 한없이 약한 저의 모습을 보면, 어찌할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다라/아브라함은 다르다라고 치부해버리면, 지금 현재 저와 교감하시는 하나님께 너무나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때로는 순종한다는 것이 저에게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때로는 다른 길을 찾아 다니는 세상사람들과 별반 차이도 없는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 더욱 힘과 능력을 구합니다. 저의 인식 밖에 계셔서, 제가 당장은 알지 못하고/이해하지 못해도, 항상 저를 위해 최선의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할수 있도록 더욱 강건한 믿음을 위해 기도합니다.

    다른 하나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이삭은 어떠한 마음을 가졌을까도 생각해봅니다 (예전에 목사님께서도 한번 말씀해 주신것 같습니다). 자신의 목숨보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아버지를 보면서, 그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 절대적인 하나님이, 더 크게 자리 잡았을수도 있겠다라는 생각해보면, 아브라함을 시험해보려고 했던 이 사건은 어쩌면 이삭에게 더욱 강건하고 국건한 믿음을, 다시말해 다음세대에서 믿음을 온전히 전달하려 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었을까도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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