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저자는 “이런 일들이 일어난 뒤에”(1절)라는 말로 시간적 간격을 상정합니다.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던 때로부터 한참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분은 먼저 “두려워하지 말아라”고 위로해 주십니다. 뒤이어 나오는 아브람의 응답을 보면, 이 두려움은 자식이 얻지 못한 것으로 인한 감정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자신이 그의 “방패”요 그가 “받을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확인해 주십니다.
아브람은 마음 속에 숨겨 두고 있던 질문을 하나님께 꺼냅니다(2-3절).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자손을 “땅의 먼지처럼”(13:16) 많아지게 하겠다고 하셨는데, 아직 자식이 없습니다. 그는 만일 자식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가장 신뢰하는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기로 마음 먹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너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4절)이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답하시고는 아브람을 데리고 나가 하늘의 별을 보여 주시면서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해 주십니다(5절). 인간적인 조건으로 볼 때는 그 약속을 믿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경험했기에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6절).
7절부터 21절의 이야기는 1-6절의 이야기와 분리하여 읽어야 합니다. 자녀에 대한 약속을 확인 받은 만남이 있은 후, 또 다른 만남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7절). 아브람은 그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고 여쭙니다(8절). 하나님은 여러 짐승을 반으로 쪼개어 서로 마주 보게 차려 놓으라고 명하십니다(9절). 아브람은 명령대로 행합니다(10-11절).
해 질 무렵에 아브람은 깊은 잠에 빠졌고 깊은 어둠과 공포가 그를 짓누릅니다(12절).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로 인해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장차 그의 자손들에게 일어날 일들을 예언해 주십니다. 즉 그의 자손들이 다른 나라에서 사백 년 동안 종살이를 하겠으나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 나라를 심판하시고 아브람의 자손을 구해 낼 것이라고 하십니다(13-14절). 그 때까지는 가나안 땅에 온전히 정착하지 못할 것입니다(15절). “아모리 사람들의 죄가 아직 벌을 받을 만큼 이르지는 않았기 때문”(16절)입니다. 즉 가나안 땅의 주민들의 죄악이 커져서 심판할 때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을 그 땅에 이끌어 들이겠다는 뜻입니다.
해가 지고 어둠이 짙게 깔리자 불길이 나타나 쪼개 놓은 짐승 사이를 지나갑니다(17절).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맺은 언약에 인을 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을 소유로 주시겠다는 약속을 다시 확인해 주십니다(18-21절).
묵상:
사래는 불임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아브람에게 문제가 있었다면, 사래에게는 바로의 아이가 들어섰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것은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인간적인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믿었습니다. 지금까지 믿어 온 하나님이 진실로 살아 계시다면 그분이 어떤 방식으로든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은 사래가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믿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입니다. 2천 년 전에 흘렸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오늘 나의 죄를 씻는 능력이 된다는 것도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음으로써 우리가 새 사람이 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것도 믿음으로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가장 값지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롬 4:3).
믿음의 대상은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어떤 교리를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분께 자신의 인생을 맡기고 한결같이 그분을 신뢰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즈음에 ’믿음‘이라고 번역되었던 헬라어 ’피스티스‘를 ’신실함‘ 혹은 ’한결같음‘ 혹은 faithfulness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현실에서도 여전히 그분을 믿고 기다리고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그렇게 믿는 사람을 의롭다고 여기십니다.
나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해주는 사람보다는 나의 선의를 한결같이 믿어주는 사람이 나를 가장 기쁘게 합니다. 때로 악의를 가진 것처럼 말하고 행동해도 “무슨 이유가 있겠지” 하고 선의를 믿어주는 사람,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한결같이 믿고 신뢰할 때 그분은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분이 안 계신 것 같거나 그분에게 버림 받은 것 같은 상황에서도 “무슨 이유가 있겠지” 하고 그분을 의지하는 것이 ‘구원할 만한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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