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2장 4-9절: 현실은 시험이다

해설:

저자는 아브람이 하나님의 명령에 즉시 순종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4절).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우직하게 순종했음을 강조한 것과 같습니다(6:22; 7:5). 그때 그의 나이는 75세였고, 조카 롯도 데리고 갑니다(5절). 아버지 데라가 아직 살아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는 가나안 땅에 이르러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정착할 땅을 찾습니다. 

그는, 후에 사마리아로 불리게 된 중부 지방의 세겜에 이릅니다(6절). 그곳에 “상수리 나무가 있었다”는 말은 비옥한 땅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그곳에 정착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가나안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이주민으로서 낯선 땅에서 토착민들의 배척을 경험하는 것은 존재의 기반을 흔드는 두려운 일입니다. 아브람이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불안해 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장차 그 땅을 그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람은 그곳에서 단을 쌓아 예배를 드립니다(7절).

아브람은 그곳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와 산간 지방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는 그곳에서도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립니다(8절). 하지만 얼마 지나 그는 그곳을 떠나 네겝에 자리를 잡습니다(9절). 네겝은 광야 지역입니다. 평야 지대에서 배척받아 산악 지대에 정착했던 아브람이 다시 광야 사막 지대로 이주해야 했다는 말은 상황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묵상:

하나님의 부름을 따라 안전지대를 떠난 아브람은 이주민으로서 가나안 땅을 전전 합니다. 우르 지방을 떠나 하란에 정착하면서 그는 이주민이 겪어야 할 차별과 냉대와 배척을 어느 정도 경험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는 아버지 데라의 보호 아래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이른 아브람은 이주민으로서 겪어야 할 모든 차별과 냉대와 배척을 온 몸으로 받아내야 했습니다. 가나안에 먼저 정착한 사람들은 그에게 정착할 틈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야 지방을 떠나 산악 지방에 임시 거처를 정합니다. 하지만 거기서도 오래 가지 못하고 광야 사막 지방으로 밀려 납니다.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4절부터 9절까지의 내용은 아브람의 가족이 수 년 동안 겪은 일에 대한 요약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안전지대를 떠나는 것은 한 순간의 결단이면 됩니다. 하지만 떠난 이후로 겪어야 하는 일상의 현실들은 매일 반복되고 지속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떠나는 행위보다 순종의 결과로 인해 차별과 냉대와 배척을 매일 겪어야 하는 것이 훨씬 더 벅찬 과제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지 못하면 현실의 고난 중에 믿음을 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멀어 보이고 매일 겪어야 하는 고난은 가깝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아브람의 믿음은 이주민으로서의 고단한 삶의 여정 중에도 계속 됩니다. 그는 현실의 상황이 점점 악화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래서 그는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에게 있어서 상수는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었습니다. 그 어떤 변수도 그 상수를 흔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하나님께 신실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의 상황을 상수로 두고 하나님의 임재를 변수로 둡니다. 나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임재를 인정 하다가도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하나님의 임재를 의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기복이 심합니다. 한결같지 않습니다. 그런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눅 18:8)고 물으셨습니다.  


Comments

4 responses to “창세기 12장 4-9절: 현실은 시험이다”

  1. gachi049 Avatar
    gachi049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의 앞길을 아시기 때문에 아브람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사용하시기 위해 훈련시켜서 가나안 땅 여러곳에 제단을 쌓게 하신 것 같습니다. 아브람 처럼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어려움과 고난이 와도 그분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삶의 우선순위에 올려놓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동행하시고 인도하옵소서.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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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평안할때나 어려울때나 항상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마음의 평정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인생이 힘든 순례의 길인것을 깨닫고 잠시의 정착지에서도 먼저 제단을 쌓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죄로 물든 세상에서 달콤하고 교활한 유혹에 너머지지않고 오직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사귐의 소리 식구 모두가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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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믿음 faith’을 ‘신실함 faithfulness’으로 번역한다는 어제 해설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믿음을 추상적인 명사로,
    영성으로 높은 단계에 이르면 생기는 어떤 막연한 상태로 생각하는 한 현실에서 마주하는 일들을 감당하게 하는 ‘능력’의 샘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결심이 내적인 약속이라면, 신실함은 그 약속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누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지만 그가 신실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드러납니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명령 때문입니다. 노아가 벌거벗은 채 잠이
    든 모습을 보고 조롱한 아들 함에게 노아는 저주를 합니다. 함의 후예들은 셈과 야벳의 종이 될 것이라고 저주합니다. 가나안은 함이 낳은
    아들 중 하나입니다. 데라의 아들 하란처럼 사람의 이름이며 또 땅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명하실 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아브람은 가나안을 일차 목적지로 삼고 들어갑니다. 노아의 저주가 후손들 의식 속에 이미 각인되어 있어서
    ‘자동적으로’ 가나안 땅을 접수할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아브람은 가는 도중에 하나님을 경험하는 곳에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는 가인이 아벨을 죽인 뒤에 아담과 이브가 낳은 셋에게서 나온 에노스 대에 처음 등장합니다. 에노스 때부터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예배에 대한 언급은 없다가 아브람의 여정에서 오늘 다시 나옵니다. 그동안 예배가
    없어졌다가 아브람 때에 다시 생긴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배의 의미를 환기 시키는 구절일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겪는 만만치 않은
    현실에 대한 아브람의 태도를 ‘예배’라고 부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여기까지 걸어 왔습니다.
    그럭저럭 살아 왔는데 또 다른 장소에서 또 다른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를 믿기에 나는 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할 그
    무엇이 예배였을 수 있습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깨끗한 새와 좋은 짐승을 골라 (8:20) 번제물로 올린 예배처럼, 아브람도 감사의
    제단을 쌓은 것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예배했는지는 모르지만 왜 했는지는 알 것 같습니다. 우리는 매주 공동 예배를 올립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올린다고 고백하고 기도합니다. in spirit and in truth 예배를 올립니다. 신령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고
    말씀하신다는 것, 진정은 하나님께 신실하고 의리를 지킨다는 것, 이 두가지가 예배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과 신실함으로 with
    faith and faithfulness 예배를 올린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어제 교단 총회 소식을 읽으면서 예배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성소수자 목회자와 교인들에 관한 제한 언어가 장정에서 마침내 지워지기 시작했다는 뉴스를 읽으면서 안도감 만은 아닌,
    ‘어렵고 복잡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 감정은 ‘이젠 예배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고민하지
    않으면 굳이 교회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 한인교회의 예배 형식과 예전, 언어 밖에 모르는 나에게 예배가 무엇이냐고
    물어오면 주보를 보여주며 설명하겠지요. 주일에 교회에서 하는 여러가지 일들을 설명하겠지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것이 예배라고
    ‘정답’을 말하겠지요…그럴까요. 주께서 기대하시고 기다리는 예배가 그런 예배일까요. 교회에 포함되기를 바랬던 성소수자 (를 비롯해
    여러 다른 이유로 교회에 불편했던 사람)가 어제 느낀 감동과 감사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린다면…주님, 나의
    안일함과 교만을 제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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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mkkim2 Avatar

    상수와 변수, 말씀처럼,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이 변치않은 상수임을 철저희 깨닫고 살아가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처한 상황이 언제나 변수가 되겠지만, 시시때때로 변하는 저의 마음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국건해지기를 소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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