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5장 1-32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해설:

하나님의 창조,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로써 창세기의 1막은 끝이 납니다. 6장부터는 창세기의 제 2막이 시작됩니다. 창세기 5장은 제 1막과 제 2막을 연결짓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형에게 살해 당한 아벨 대신으로 얻은 셋으로부터 노아에 이르는 장구한 역사의 이야기들을 성경 저자는 족보로 대신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5장의 족보와 11장의 족보를 결합하여 인류의 연대기를 추산합니다. 그렇게 계산하면 아담으로부터 우리 시대까지의 연대가 6천년이 조금 넘는 것으로 계산이 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연대 계산에는 여러가지 난점이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표현은 때로 수대를 건너 뛰어 선조와 후손을 연결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족보의 시작하면서 저자는 창세기 1장과 2장을 요약합니다(1-2절). 이 요약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2절)라는 말씀입니다. 3절부터 이어지는 족보를 통해 저자가 전하려고 했던 것은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복이 대대손손 이어진다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독자는, 4장에 나오는 가인의 가계와 비교하여 셋의 족보를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긴 가인의 가계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보이지 않지만, 셋의 가계는 다산과 장수의 축복이 넘쳐납니다. 5장에 나오는 아담의 자손들은 365년을 산 에녹 외에는 적게는 5백년, 많게는 천년 가까이 살았습니다. 이것도 역시 거룩한 가계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이 족보는 죄를 지은 후에 아담에게 주어진 죽음의 운명이 어김없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22절)하면서 365년을 산 에녹에 대해 창세기 저자는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24절)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데려가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카’는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저자는 죽음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데려감을 당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히 11:5).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 “죽었다”(5절, 8절, 11절, 14절, 17절, 20절, 27절, 31절)고 표현한 반면 에녹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데려가셨다”고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에녹은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3분의 1도 못 살았습니다. 물리적 시간의 양으로 보면 그는 짧게 살다가 갔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22절)라는 표현을 통해 그의 지상 삶이 결코 짧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 얼마나 오래 사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성경의 기록 상 가장 오래 산 므두셀라(969년) 보다 더 충만하게 살았다 할 수 있습니다. 

이 족보는 결국 노아에 이릅니다. ‘노아’라는 이름은 ‘위로’라는 뜻입니다(29절). 그의 아버지 라멕은 “주님께서 저주하신 땅 때문에, 우리가 수고하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데, 이 아들이 우리를 위로할 것이다”(29절)라고 말합니다. 라멕은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도 못한 채 장차 일어날 일을 예언한 것입니다. 

홍수 이전 시대의 사람들의 수명은 매우 길었습니다. 또한 아이를 낳기 시작한 연령도 꽤 늦습니다. 아담은 133세에, 셋은 105세에, 에노스는 90세에 아이를 낳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홍수 이전 시대 사람들은 수명이 길었던 반면에 신체 변화의 속도가 느렸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것은 홍수 이전의 생태계가 홍수 이후에 크게 바뀐 까닭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묵상: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장수와 다산은 모두가 선망하는 복입니다. 저자는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2절)라는 말로 셋의 족보를 소개하면서 장수와 다산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반면, 4장에 나오는 가인의 족보(17-24절)에는 죄가 증폭되고 악화되는 모습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에노스 이후에 비로소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기 시작”(4:26)하였는데, 그 후손들에게는 축복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장수와 다산보다 더 큰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저자는 에녹이 비록 다른 사람의 수명에 비해 3분의 1밖에 살지 못했지만 평생토록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의 나이가 365살이었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1년이 365일이니, 365년은 충만한 시간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에녹의 지상 삶이 하나님과의 동행으로 충만했다는 의미로 풀 수 있습니다. 5장에 열거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에녹은 가장 귀하고 값진 축복을 받은 셈입니다.   

믿음의 삶이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모세에 대해 말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분을 마치 보는 듯이 바라보면서”(11:27)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깊이 사귀고 그분과 동행하면 “에덴의 동쪽”(즉 하나님의 임재에서 멀어진 상태)에 살고 있지만 실은 에덴에 살고 있는 셈입니다. 아삽은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나에게 복이니”(시 73:28)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믿음의 목표는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고 죽어서 그분의 품이 안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 죽음은 비극이나 파멸이 아닙니다. 지상에 사는 동안 추구했던 것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빌 1:21)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창세기 5장 1-32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1. 지금까지 살아온것이 온전히 주님의 은혜인것을 고백합니다, 아주 짧고 순간적인 주님의 같이하심을 체험하였지만 함께하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피부로 함께하시는 주님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살기를 원합니다. 사랑의 십자가를 잊지않고 마지막 숨쉴때까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십시오. 허락하신 자녀들의 영혼에 주님의 자비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Like

  2. gachi049 Avatar

    인류최초의 살인자, 가인의 족보는 죄가 점점 장성하고 아벨 대신에 주신 셋의 가계는 장수와 다산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장수와 다산의 축복보다 하나님의 믿는 자들에게는 더큰 축복이 에녹처럼 그분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주님! 에녹과 같은 삶을 살 순 없지만 내가 만난 부활의 예수님, 성령님과 동행하여 인도하심을 받고 주님의 지상명령을 이루어드리며 사는 남은 여정이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Like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창세기 1장부터 5장 까지를 근거로 창조론, 창조신학, 창조과학, 무에서 유 (creato ex nihilo) 등이 진리라고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도 그냥 진리가 아니라 유일한 진리라서 다른 이론은 곧 이단이라고 믿는 신도들이 많습니다. 우리 교회도 10여년 전에 그랜드 캐년을 창조신학의 증거로 삼는 세미나를 만든 어느 목사님을 초대해 그랜드 캐년에 가 보고 강의도 듣는 프로그램을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믿지만, 진화론 (요즘에는 유신진화론이라고 구분해서 부르기도 하는)이 비신앙적인 가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나의 과학 지식과 탐구 소양이 부족해서 세상의 이치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답답하게 생각합니다. 어제는 자기 전에 다큐멘터리 “Our Planet” 의 한 에피소드를 봤습니다. Alcon Blue Butterfly 라고 부르는 나비가 있는데 유럽과 시베리아, 몽골에서도 특정한 지역에서만 볼 수 있답니다. 특정한 지역의 특정한 풀잎 위에만 알을 낳아 애벌레가 되는데, 애벌레의 상태에서 스스로 땅에 떨어져 개미들의 ‘밥’으로 붙잡혀 개미굴로 운반됩니다. 그 애벌레는 개미 애벌레의 냄새를 모방해 분출하는 재주가 있어서 개미굴에서 일반 개미 애벌레와 함께 자랍니다. 더 나아가 나비 애벌레는 여왕개미의 냄새를 내기 까지 해서 개미들은 먹을 것이 부족하면 자기 애벌레들은 안 먹여도 나비 애벌레는 꼭 먹인다고 합니다. 이렇게 알콘 불루 나비의 유충은 개미들 틈에서 영양 공급을 잘 받아 살이 토실토실하게 오르도록 자라다 드디어 껍질에서 나와 굴을 떠납니다. 23개월을 지내던 굴 안에 껍질만 남겨 두고 지상으로 올라와 날개를 펼쳐 날아 오릅니다. 굴 속에 남겨둔 껍질 주변에 개미 몇 마리가 돌아 다닙니다. “나 지금 뭘 본거야?” 하는 개미들 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경이로왔습니다. 기가 막힌 카메라웍에 놀라고, 기가 막힌 자연의 생존방식에 놀랐습니다. 새 한 마리에 관심을 기울이시는 창조주는 개미와 나비의 생명도 보고 계십니다. 개미와 나비는 선악과를 먹지 않아 선과 악을 모를까요. 선과 악이라는 개념 대신에 활동과 소멸을 명령으로 삼고 사는거지요. 우리는 우리의 기준으로 선과 악을 나눕니다. 공공의 선과 악의 경계도 나의 선과 악 앞에서는 흐트러지고 무너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를 예배하며 사는 것이 나의 생존술입니다. 신앙의 진화를 원합니다. 앞으로 나아가며 발전하는 신앙을 구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Like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