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장 1-13절: 스스로 하나님이 되기를 선택하다

해설:

창세기 2장과 3장 사이에는 거대한 시간적 간격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하나의 이야기와 다음 이야기 사이에 시간적인 간격을 상정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때로는 수 일, 수 개월, 수 년 혹은 수백 년의 간격을 전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이후 에덴의 완전한 평화와 행복이 얼마간 지속되었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3장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유를 만끽 하면서 낙원을 즐겼을 것입니다. 

그 ‘무한자유’에 권태를 느낄 즈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나무를 쳐다 보지도 않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나무에 자꾸만 눈길이 갔을 것입니다. “뱀은, 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서 가장 간교하였다”(1절)는 말은 소통 능력에 있어서 다른 짐승보다 뛰어났다는 뜻입니다. 타락 이전에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뱀은 아담과 하와의 마음에 죄를 향한 욕망이 형성되고 있음을 눈치 채고 그들의 마음을 흔듭니다. 뱀의 질문에 대한 하와의 대답(2-3절)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지 못하게 하신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담겨 있습니다. 

뱀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하와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 의혹을 제기합니다(4-5절). 뱀의 말은 절반의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선과 악을 알고 판단하는 것은 전지의 능력을 가진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선과 악을 아는 능력을 가지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선과 악을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인간으로서는 선과 악을 부분적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을 의지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뱀의 말에 혹하고 나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보는 하와의 눈이 달라집니다. 뱀의 말에 용기를 얻고 제대로 쳐다 보니, 매우 맛있어 보였고, 보기에도 아름다웠으며, 먹으면 지혜로와질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는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열매를 따서 먹었고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합니다(6절).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서로가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 몸을 가립니다(7절). 그 열매를 먹고 나서 그들이 처음 알게 된 악은 수치심이었고, 그 수치심은 사랑으로 하나 되었던 두 사람을 분리시켰습니다.

그들의 죄는 또한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을 깨뜨립니다. “주 하나님이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8절)는 말은 그분이 사귐을 위해 다가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하나님을 피하여 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9절)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왜 거기에 있느냐?”는 뜻입니다. 그분은 아담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자 아담은 자신이 벗은 것을 알기에 숨어 있다고 자백합니다(10절). 하나님은 아담이 사고를 쳤다는 사실을 아시고 확인차 물으십니다(11절). 두려움에 질린 나머지 아담은 얼떨결에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 그 여자가…”라고 말하면서 책임을 하와와 하나님에게 돌립니다(12절). 그러자 하나님은 하와에게 물으셨고, 하와는 뱀에게 핑계를 댑니다(13절). 

해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정체와 그것을 에덴에 심어 두신 하나님의 뜻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합니다. 얼른 생각하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좋은 나무처럼 생각됩니다.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피조물로서는 선과 악을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피조물로서 판단할 수 있는 선은 다만 ‘지금’ ‘여기서’ ‘자신에게’ 유익해 ‘보이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선이 아닙니다. 진정한 선은 지금 뿐 아니라 미래에도(언제나), 여기서 뿐 아니라 저기서도(어디서나), 자신에게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모두에게), 그렇게 보일 뿐 아니라 진짜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절대적 선과 악을 아는 것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리를 탐한다는 뜻입니다. 그 점에서 뱀의 말은 옳았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고 살겠다는 말은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부정한다는 뜻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은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피조물로서의 자신의 자리를 지키라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에덴의 삶은 그분이 창조하신 질서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위로 하나님을 모시고 아래로 모든 피조 생명들을 관리하며 마음에서 느껴지는 대로 행하면 그것이 의가 되고 선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하나됨으로 인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묻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마음 끌리는 대로 살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렇게 사는 것에 권태를 느끼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싶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행위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거역한 것이기도 했지만,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살기를 선택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독립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그 행동은 완벽했던 에덴의 평화와 의와 사랑에 균열을 일으켜 놓았습니다. 자동차 유리에 금이 가면 서서히 번져서 유리창 전체가 무너지는 것처럼, 첫 사람들의 죄는 그렇게 하나님의 아름다운 피조 세계를 망가뜨렸습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창세기 3장 1-13절: 스스로 하나님이 되기를 선택하다”

  1. gachi049 Avatar

    하나님과 같이 살면서 자신의 벌거 벗은 모습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사랑에 취한 삶은 어떤 삶일까를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사랑의 안경을 끼고 있다면 상대방의 부끄러운러운 모습을 눈으로 알지 못했을것입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꼬득여 넓디넓은 지옥을 채우기 위해 혈안이 되고 있으니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랑의 예수님 만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동행하시고 인도하시옵소서.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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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지난날의 수없는 잘못에 핑계를 하였습니다, 허황된 바램을 위해 분수없는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자신이 주인이되어 살아왔습니다. 은혜를 온전한 마음으로 감사하며 십자가 없이는 한순간도 살수없는 피조물인것을 깨닫고 주님 사랑, 이웃 사랑하며 살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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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오늘은 의료 검사를 받는 날이어서 새벽부터 서둘러야 했습니다. 검사 받고 와서 가게 문을 여니 아침은 벌써 낮이 되었습니다. 창세기의 시간이 우리의 시간과 다르다는 깨달음은 창세기를 여러번 읽으며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 볼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고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나님이 ‘쓰신’ 책이라고 하는 말 만이 진실이라고 받아들이면 문자적인 해석 외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어릴 때 처음으로 창세기를 읽었을 때엔 그렇게 읽는 것 밖엔 몰랐습니다. 쓰여진대로 읽고 (토씨도 바꾸지 말 것), 궁금해도 자꾸 캐묻지 말고 성경에서 그렇다면 그런거라고 ‘믿으면’ 되는 걸로 알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라도 성경을 읽는 것이 중요할까, 아니면 성경을 통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할까… 묻게 됩니다. 3장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대화’입니다. 1장과 2장은 하나님의 독백 (명령)과 아담의 독백 뿐입니다. 3장에서 우리는 여자에게 말을 거는 뱀을 봅니다. 하나님과 아담이 대화를 하고 (묻고 답하고), 여자도 하나님과 대화를 합니다. 놀랍게도 이 대화들은 오늘 우리가 하는 대화와 똑같습니다. 단어들만 다를 뿐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인류의 조상이며 전형 archetype 이라고 하는 것을 대화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들이 오래 전에 밀튼의 실낙원 “Paradise Lost”을 읽으면서 단어의 힘 power of words 이 인상적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 납니다. 실낙원은 epic poem 장편 서사시의 형식으로 된 책이고 하나님, 천사, 사탄의 말을 주로 담고 있습니다. 아들은 사탄의 말솜씨 (를 글로 표현한 작가가 대단한거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말로 유혹하는 사탄을 보면 말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알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여자와 뱀의 대화를 읽는데 오래전 아들의 말이 생각 났습니다. 실로 언어는, 말은, 축복이며 저주입니다. 선거가 있을 때 우리는 말의 환상과 횡포, 위로와 희망에 휘둘립니다. 3장에서 또 처음 발견하는 것은 감정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선악과가 가진 힘 – 하나님처럼 (알게) 된다 – 을 말했을 때 여자가 느꼈을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아, 정말? 나만 모른거야? 하나님은 왜 그 말은 안하셨지? 금지된 것을 하고 싶은 마음, 규칙을 안 지키고 싶은 마음, 충동에 따르고 싶은 마음…이런 마음은 단순하기 그지 없는, 길 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마음입니다. 여자에게 뱀의 유혹에 맞설 무기가 있다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신뢰가 조금만 더 있었다면 에덴의 이야기는 다르게 펼쳐졌을 수도 있겠습니다. 아담과 여자는 수치심이라는 새로운 감정도 느끼게 됩니다. 서로의 벗은 몸을 보고 사랑이나 연민이 생긴게 아니라 수치심이 생겼습니다. 상대방 뿐 아니라 자신도 부끄럽고, 안 예쁘고, 한심하게만 느껴졌을 것입니다.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꼬임에 넘어가 너무 큰 것을 잃었습니다. 주님,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군요. 달콤하고 화려한 것의 유혹은 이리도 치명적이군요. 주님 도와주세요. 주님의 지혜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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