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6장 9-11절: 부활 신앙의 기초

해설:

9절부터 11절의 내용은 마태복음 28장 9-10절과 요한복음 20장 11-18절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이 구절을 첨가한 사람은, 빈무덤 안에서 보고 들은 것으로 인해 무서워 떨고 있던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찾아가 그 소식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독자에게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세 명의 여인 모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요한복음은 막달라 마리아만을 주인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마가의 첨가자는 요한복음을 따라서 막달라 마리아에게만 초점을 맞춥니다(9절).

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부활 이야기들을 비교해 보면 일치하지 않는 점들이 많이 나옵니다. 빈무덤에 찾아간 여인의 수도 다르고, 무덤에 있던 사람의 수도 다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야기들도 자세히 비교해 보면 여러 가지 차이점이 발견됩니다. 부활 사건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이 불일치 현상들을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 해주는 증거로 여깁니다. 

하지만 이 불일치 현상들은 부활 사건의 역사성을 반증해 줍니다. 만일 초대 교회가 부활 사건을 조작하여 꾸며냈다면 이렇게 허술하게 했을 리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 사건에 대한 최초의 증인을 여자로 삼은 것도 조작설을 흔듭니다. 당시 법정에서는 여성들의 증언에 무게를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가 빈무덤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라면 분명히 남성들 중에서 주인공을 택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기억은 매우 부정확 합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일을 겪은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충격적인 사건을 겪는 경우에도 그렇고, 영적인 체험의 경우에는 더 더욱 그렇습니다. 빈무덤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세 여인을 따로 불러 보고 들은 것을 기억하여 말하라고 했다면, 그들은 여러가지 점에서 다른 말을 했을 것입니다. 일어난 사건은 한 가지였지만, 보는 사람의 기억에는 달리 저장되기 때문입니다. 마가가 부활 이후의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마리아가 제자들을 찾아갔을 때, 그들은 “슬퍼하며 울고”(10절)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통을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고, 그분과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한 자신들의 실패 때문이었을 것이며, 산산히 깨어진 그들의 거대한 희망 때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들을 찾아가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과 자신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마리아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11절). 당연한 일입니다. 만일 그 말을 듣고 단박에 믿었다면, 그 사람의 정신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묵상: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과학적 증명은 ‘반복적인 사건’에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반복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한 그것은 합리적인 설명의 대상도 아닙니다. 보편적인 인간 경험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믿음의 대상입니다. 억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과 이성을 초월하여 믿게 되는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여인들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천사로부터 예수님이 살아나셔서 갈릴리로 가실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지만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보고 들은 것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고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혼란과 두려움에서 벗어난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의 일입니다.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과 자신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제자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도, 믿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이 부활의 사건을 믿게 된 것은 부활하신 주님과 만났을 때의 일입니다. 빈무덤은 그들에게 믿음을 가져다 주지 못했습니다. 오직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 그들로 하여금 부활을 믿게 했습니다. 빈무덤은 그들이 믿는 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증거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들은 우리에게 빈무덤과 같습니다.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여인들이 “이게 뭐지?” 하고 혼란스러워 했던 것처럼, 복음서의 부활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은 “이게 다 뭐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하고 혼란스러워 하게 됩니다. 그것을 증거로 여기고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믿을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고 그분이 살아 역사하고 계시는 것을 경험하고 나면, 비로소 부활의 이야기들이 납득이 됩니다. 자신이 영적으로 경험한 그분이 이천 년 전에 이 땅을 걸으셨던 그분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도 장차 그분의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마가복음 16장 9-11절: 부활 신앙의 기초”

  1. 신기하게도 반신반의한 부활 신앙을 23년전 성경공부중에 새로 믿게된 자매가 전지전능의 하나님이시기에 예수님의 부활이 가능했다는 고백으로부터 부활신앙을 허락하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믿음을 꼭 붙잡고 마지막 숨쉴때까지 주님사랑 이웃사랑하며 살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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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gachi049 Avatar
    gachi049

    창조주 하나님을 피조물인 인간이 그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한 실체도 육신의 눈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피조물을 다스리시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 믿는 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당연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마지막 심판주로 다시 오심을 믿고 점점 다가오고 다가올 환란과 핍박을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 믿음을 지키고 끝까지 견딜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동행하시고 도와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 할 뿐입니다.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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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부활하신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9절).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10절).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11절). 마리아와 여인들도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고서야 제자들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제자들 역시 믿지 않았습니다. 오늘 세 구절 말씀은 똑같은 행동의 반복을 보여 줍니다. 여인들도 제자들도 부활하신 주님을 보기 전엔 믿을 수 없었습니다. 나도 직접 봐야만 믿는 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보는대로 다 믿는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안 본 것을 잘 믿을 때도 있습니다. 나도 나를 믿을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믿는다는 것은 논리적인 영역의 일이 아닙니다. 믿음을 설명하는 것과 믿음을 갖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기 앞에 나타나시자 슬픔과 혼란 속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마음에 찼던 안개 같은 것이 거둬졌을 것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봄으로써 마음이 새로와졌습니다. 나도 예수님을 ‘보면’ 백퍼센트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보면 믿음이 좋아지고, 모든 질문의 답을 알게 되고, 마음의 우수가 다 사라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럴까요… 예수님은 부자 집 앞에서 구걸하던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지옥에서 고통 받는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간청합니다. 제발 나사로를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어 자기가 이러고 있는 것을 말해주면 회개할 것이라고, 나사로를 보내 경고해 달라고 빕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답을 합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일어나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답이지만 실은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은 백성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보아도 믿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을 담은 답변입니다. 나는 어떨까요. 예수님을 ‘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뀔까요. 보는 것이 믿음의 절대적인 조건이 아닙니다. 보는 것은 믿음의 결과일 때가 더 많습니다. 믿기 때문에 다르게 보게 됩니다. 신체의 장기인 눈으로 보는 것은 일부입니다. 온 몸을 써서, 마음을 기울여서, 영혼의 창문으로 보는 일이 훨씬 더 많고, 크고, 또 자주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보는’ 일은 언젠가는 일어날 일입니다. 이 땅이 아닌 곳에서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예수님을 보는 것처럼 생각하며 삽니다. 그분과 말하고, 먹고, 걷고, 웃고, 한숨 쉬며 삽니다. 부활은 미스테리이고, 신앙도, 은혜도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부분이 더 큽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이 설명한다 한들 얼마나 잘 하겠습니까. 부족하고 모자란 모습을 안고 씨름하면서 주님 앞으로 나갑니다. 눈을 열어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하시고, 부활의 소망과 능력을 감당할 수 있는 그릇으로 빚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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