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6장 1-8절: 예수 다시 사셨다!

묵상 2:

신약성서 27권의 원본들 즉 원저자가 쓴 최초의 문서들은 남아 있지 않고 필사본들만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은 학자들이 필사본들을 연구하고 비교하여 원본에 가깝도록 복구해 놓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신뢰성이 깎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본문은 어림 잡아 98% 이상 원문과 일치합니다. 나머지 2% 정도의 본문들이 확정하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결말 부분이 2%에 속하는 대표적인 본문입니다. 고대의 믿을 만한 사본들은 대부분 16장 8절에서 끝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9절 이하의 본문이 후대에 첨가된 것이라고 봅니다. 마가복음이 쓰여지고 필사되어 읽히는 중에 결말 부분이 미흡하다고 느낀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복음서들을 참고하여 빈무덤 이후의 이야기들을 마가의 문체로 요약해 놓았습니다. 지금까지 세 종류의 첨가 부분이 발견되었습니다. 

16장 8절이 결말로서 미흡한 이유는 여인들이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하였다”(8절)는 서술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뭔가 완결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1) 마가가 그 이후의 이야기를 썼는데 전해지는 중에 마지막 장을 잃어 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고(유실가설), 2) 8절까지 쓰고는 마가가 체포되어 더 이상 쓸 수 없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절필가설). 하지만 요즈음에는 마가가 미완의 결론을 의도한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절대 다수입니다. 

그렇다면 마가는 왜 이렇게 ‘결론 같지 않은 결론’을 낸 것일까요? 마가복음을 처음 받아 읽은 독자들은 네로의 박해 아래에서 두려워 떨고 있던 로마 교회 교인들이었습니다. 바울과 베드로가 이미 순교를 당한 이후였을 것입니다. 로마 교회 교인들은 자신들에게도 박해와 순교의 피바람이 닥치지 않을까 두려워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움에 질려 아무 말도 못하고 있던 여인들과 같은 처지에 있었습니다. 여인들은 지금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곧 마음을 정리하고 제자들에게 찾아가 그 소식을 전합니다. 그로 인해 복음은 퍼져 나갔고 로마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마가는 박해와 순교의 피바람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던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기 위해 여인들이 두려워 떤 것으로 결론 지었을 것입니다. 이해 못할 박해의 불길 앞에서 두려워 떠는 것은 당연하다고 위로하는 한편, 여인들처럼 그들도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나라고 위로를 준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순교에의 초대”라는 별명으로 불려져 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복음은 오늘 우리에게 맡겨졌습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면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미움 받을 것이 두렵고, 어떤 사람은 무시 당할 것이 두렵고, 어떤 사람은 배척 받을 것이 두렵습니다. 기독교 박해 국가에서는 실제로 순교를 두려워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부정적인 반응 앞에서 움츠러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실로 부활의 소식을 믿는다면, 결국 용기를 내어 입을 열어야 합니다. 그럴 때 복음 자체에 생명력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마가복음 16장 1-8절: 예수 다시 사셨다!”

  1. 북한에서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것은 헛된 만용이라고 생각해온 비굴한 자입니다. 골수 회교도 나라에서 살면서 부활의 주님을 선포하라고 하시면 스페인으로 도망하다가 죽었을 비겁한 자입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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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gachi049 Avatar
    gachi049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믿기에 지금까지 기독교가 존재하고 지금도 복음을 전하느라 수많은 선교사들이 순교를 각오하고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극심한 종교 전쟁으로 많은 생명들이 희생될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주 만물를 창조하시고 사랑으로 다스림을 믿고 부활을 통하여 영생을 믿고 끊임 없이 복음을 전하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어야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로 하나님과 사귀고 믿음의 공동체와 사귐을 기반으로 이웃과 사귐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와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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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부활은 미스테리입니다. ‘알 수 없는’이라는 수식을 굳이 붙이지 않아도 미스테리는 늘 미스테리로 남습니다. 미스테리가 풀리면 더 이상 미스테리가 아닙니다. 신앙도 실은 미스테리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정의, 신앙의 조건, 신앙의 체계, 신앙의 증거…뭐라고 부르든 누구나 백퍼센트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 위에 선 것이 아닙니다. 눈이 많은 오는 나라에서는 눈을 가리키는 단어가 여러가지입니다. 눈이 전혀 오지 않는 나라에선 눈이라는 말을 쓸 일이 없으니 단어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경험이 언어에 앞서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있는 언어를 빌려서 자신의 경험을 체계화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인간계에서 부활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죽은 것은 죽은대로 있습니다. 죽었는데 또 살아나면 세상은 혼란스러워져서 혼돈 속에서 멸망할 지 모릅니다. ‘일어나면 안 되는’ 부활인데 우리의 신앙에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고 사도들이 먼저 고백했고 그들을 따라 우리도 똑같이 고백합니다. 2세기 경에 초대교회에서 시작되었는데 제자들의 전도를 받은 후대의 신자들이 사도적 신앙을 계승 받아 정리한 고백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나오기까지 어떤 박해 속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았는지는 역사가 말해줍니다. 오늘 해설에도 마가복음서가 쓰여진 시대적 배경이 나옵니다. 지금도 이 때와 비슷한 상황 속에서 신앙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위험과 위협 속에 놓여 있으면서 믿음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경험이 언어를 이끈다는 전제가 맞다면 그들의 부활 언어는 풍성하며 다채로울 것입니다. 지금 나의 언어는 빈곤합니다. 눈이 오지 않는 지역에 살면서 눈 얘기를 하는 사람처럼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그런데 언어가 경험을 이끈다고 전제하고 보면, 경험한 일들 중에 얼마나 많은 은혜와 신비, 미스테리가 있었는지요. 그 경험에 언어가 이름을 붙여줍니다. 이것은 ‘부활’이다 라고. 부활의 소식을 전해야 하는 사명 앞에서 망설입니다. 넘쳐나는 자기 이야기들 속에 나도 한마디 거들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말로 전하라는 뜻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말을 보태라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믿음의 고백 -사도신경, 주기도문, 성경공부, 선교, 구제, 교회출석…이 예배로 이어지는 삶을 살라는 뜻이겠지요. 예배가 삶에서 보여지는 것, 삶이 예배와 만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아야겠지요. 마가가 내린 ‘결론 같지 않은 결론’을 나의 언어로 바꿔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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