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1장 1-11절: 나귀를 타신 이유

해설:

예수님의 일행은 드디어 시온 산 맞은 편(동편) 올리브 산에 이릅니다. 그곳에 베다니라는 마을이 있는데, 예수님은 그곳에서 제자 둘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시어 나귀 새끼 한 마리를 끌어 오게 합니다. 예수께서 미리 어떤 사람을 통해 준비해 놓으셨던 것입니다(2-6절). 제자들은 나귀 등에 겉옷을 걸쳐 놓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나귀에 올라 타시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십니다. 올리브 산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 가려면 동편 문을 통해 들어가야 합니다. 그 문은 ‘황금문’이라고 불리는데,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실 때 그 문을 통해 들어 오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오스만 제국이 예루살렘을 점령 했을 때 그 문을 돌로 막아 버렸고 지금까지 그 문은 막혀 있습니다. 

그 때 예루살렘에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속히 임하셔서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기를 염원했습니다. 그들 중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던 사람들이 나귀를 타고 황금문을 통해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위해 겉옷을 벗어 길에다 펴기도 하고 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기도 했습니다. 그들 나름대로의 대관식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셔서 마침내 다윗 왕국을 회복하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며 암송하고 기도했던 시편 말씀 즉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9-10절)라는 말씀으로 그분을 환영합니다.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성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분은 곧바로 성전으로 향하십니다. 예루살렘이 예루살렘인 이유는 성전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전 구석 구석을 다니면서 살피십니다. 성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아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베다니로 돌아오십니다.

묵상: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신 것은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메시아로서 그분은 그곳에서 권력자들에게 넘겨져 죽음을 당하게 될 것임을 상징하는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과 무리는 나귀를 타셨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나귀가 백마로 보였고 그들이 깔아 놓은 겉옷과 나뭇가지는 레드카펫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로마 군대를 몰아내고 위대한 다윗 왕국을 회복하실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우리는 ‘나귀를 타신 메시아’를 믿는 사람들이며 ‘죽임 당하신 어린 양'(계 5:6)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그 모든 것을 비우시고 가장 낮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희생 당하신 분입니다. 그렇게 낮아져서 섬김으로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힘이 아니라 사랑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그 섬김과 희생이 죽음을 요구한다면 그것까지 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죽음이 한계이지만, 하나님에게 죽음은 하나의 단계일 뿐입니다. 새롭고 영원한 생명으로 피어나는 단계입니다. 그렇기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다면 아무 조건 없이, 아무 한계 없이 낮아지고 섬기고 희생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메시아로서 그 길을 끝까지 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길로 부르십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옛 자아를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는 높아지기를 원하고 군림하기를 원하며 부리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8:34)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예수를 믿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군중들처럼 우리도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의 죄된 욕망을 만족시키고 싶어 합니다. ‘나귀를 타신 메시아’는 우리의 부정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그 욕망을 정화시켜서 그분처럼 낮아지고 섬기며 죽는 길로 가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영원히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Comments

3 responses to “마가복음 11장 1-11절: 나귀를 타신 이유”

  1. 지난날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 하면서 주님이 세속적인 부귀영화의 근원
    인것으로 믿고 간구하는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새끼 나귀를 바친 나귀 주인
    처럼 3T(treasure, time, talents) 를 영혼 구원을 위해 기꺼이 바치는
    믿음을 원합니다.겸손과 희생 제물로 오신 평화의 왕 메시아의 사역에 동참
    하는 사귐의 소리 가족들이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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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예수님께서 보잘것 없고 낮고 낮은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권력과 재물이 아니라 겸손하고 낮아져야 한다는 본을 보여주심에 감사합니다. 나의 주인 되신 주여! 아직도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교만과 욕심을 버리고 주님의 길을 따라갈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을 주시옵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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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한국에서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면 내가 원하는 것과 반대로 하면 된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우리의 욕망은 자기 중심적이어서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반대편에 있는 자아를 하나님 편으로 끌어오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사순절은 자기를 낮추고 줄이는 연습을 하는 절기입니다. 친숙하고 편안한 옛것의 세계에서 한발자욱 나오는 시도를 하기에 좋은 계절입니다. 어제는 2주 만에 주일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발에 통증이 있어 잘 걷지를 못했는데 여전히 절름거리지만 아픈 것은 좀 나아져서 갈 수 있었습니다. 인대에 염증이 있는 것 같다며 처방해준 소염진통제와 연고도 그다지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지만 처음보다 통증이 덜한걸 보니 시간이 가면서 차차 좋아질 것이라고 바라고 있습니다. 마음껏 걷지를 못하게 되니 ‘장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디가 고장이 나서 원하는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되면 몸만 불편한 것이 아니라 정신 또한 날개가 꺾인 듯 밑으로 가라앉습니다. 잘 걸을 수 없어 불편해지니 마음도 불편해집니다. 그렇지만 좋은 일도 있습니다. 평상시와 다른 상태를 겪으니 ‘평상’에 대한 새 눈이 열립니다.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감사와 원망을 하며 살았는지 아주 잘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우리의 삶과 완전히 반대였습니다. 그분은 신이고 우리는 인간이라서 반대라는 뜻이 아닙니다. 삶의 조건이나 한계는 우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경험을 부인하고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humanity 를, 인간의 모습, 인간다움, 인간성을 새롭게 정의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웃, 자신과의 관계 안에서 새로운 눈으로 보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새 눈으로 보려면 자리를 옮겨 봐야 합니다. 다르게 봐야 다른 것이 보입니다. 아는 만큼 보는 것에서 보는 만큼 아는 것으로 전환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매해 사순절은 뭔가를 포기(금식)하거나 절실히 구하는 (기도) 것으로 채웁니다. 부활절을 맞으면 40일 간의 기도 응답에 감사하기도 하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것에 감격하기도 합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묵상하고 맞이하는 올해 부활절에 나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요. 하나님 쪽으로 다가온 나를 보고 싶습니다. ‘장애’라는 말은 결핍을 크게 보여주는 말입니다. 장애가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은 안보이고 그가 하지 못하는 것에 하일라이트를 쏩니다. 영어식으로 ‘다르게 활동하는 – differently abled’ 라는 말이 어색하긴해도 조금 낫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한번씩 달라져야 할 필요가 있나 봅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십자가 사형 선고를 받으신 예수님…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예수님은 완전히, 너무도 확실하게 differently abled 하신 분입니다.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예수님인데, everyway abled 하신 분인데, 우리를 위해 자신을 부정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주님의 은혜가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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